창조는 심심해야 나온다? 그렇지만은 않다. 여러 일로 바쁠 때, 서로 연동하는 가운데 휘몰아치듯 아이디어들이 산출된다. 이럴 때 나오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실용적이다. 심심할 때 나오는 아이디어는 대략 쓸모 있는 것과는 상관없는, 맹목적이고 합목적적인 것인 경우가 많다. 더욱 예술적이다.시인 김소연은 ‘심심하다’는 것을 가장 천진한 상태의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권태롭고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를 ‘심심하다’라고 받아들인단다. 심심한 마음이 부르는 손짓을 보고 온 것들 중에는 ‘창작 혹은 발명’ 같은 것이 포함되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013년 11월 ‘풍선 강아지’가 600억원이 넘게 거래돼 제프 쿤스는 최고가로 팔린 생존작가가 됐다. 쿤스는 지난해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짐으로써 앤디 워홀 이후에 가장 유명한 미국 작가가 됐다. 그는 60세(55년생)인데도 당시 조각 같은 몸매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전시 직전 ‘베니티 페어’(미국 유명 여성잡지)를 위해 올 누드로 화보촬영을 한 것이다. 어쩌면 문화계는 그의 누드에 놀라지도 않았던 것 같다. 25년 전 이탈리아의 포르노배우 출신 국회의원 치치올리나와의 성교 사진을 찍어 세계를
인생의 굴곡을 만날 때, 모드를 곧바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18세기 유학자 다산 정약용이 그랬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드디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다산은 18년의 세월을 원망이나 좌절 속에 보내지 않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하며 척박한 유배지를 학문의 성지로 승화시켰다.현대사회에서는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보다 AQ, 즉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AQ는 역경을 얼마만큼 잘 극복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지표로, 회복탄력
미술은 나이 들수록 빛을 발하는 장르다. 화가들의 명작은 노년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미술이 나이 든 예술가를 존경하고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는 늙음 혹은 나이듦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오래 산 작가는 대략 걸작도 남기고 살아서 명성도 누린다. 물론 모든 오래 산 화가가 주요한 작품을 남기는 건 아니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예술적 실험을 감행했지만 70~80대의 작품이 그 이전 작품들보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든지, 문제적 이슈를 냈다든지 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한다면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렘브란트의 ‘돌
언제나 ‘분노’라는 감정이 문제다. 한 끗의 감정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친다. 감정은 사람을 성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만든다. 통상 예술가들은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자주 화내고, 괴팍하고, 비수를 찌르는 말을 잘하고, 제멋대로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후원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율성을 가지고 작업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천재와 광기의 예술가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예술가들이 자기감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대개 자신들의 돈줄과 밥줄을 쥐고 있는, 소위 갑에게 어떤
싫증을 잘 내는 예술가만이 살아남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미술은 늘 새롭고 낯선 것을 만들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싫증을 잘 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던 예술가들에게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싫증이나 권태의 메커니즘을 가만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기묘하게 죽음의 냄새가 난다. 삶이 좀 식상하고 진부하고 무료하고 뻔하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더욱 강력한 자극을 찾는 일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그랬을 것이다. 더 큰 자극과 충격 속에 자신을 던졌을 것이다.고대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만큼
성공한 사람은 의욕이 넘친다. 성급하고, 분주하며, 충동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업가 기질을 타고났다고 말할 수 있다. 조증(mania) 혹은 경조증(hypomania)을 갖고 있다.조증은 과도한 활력, 대단한 쾌활함, 과잉활동, 편집증적 과대망상에서 흔히 보이는 팽창된 자존감이 특징이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자극과 낯선 경험에 대한 갈망이 크기 때문에 모험을 감수하는 일을 즐긴다. 또한 쾌활한 분위기는 수다스러움과 연결되는데, 당연히 사고의 자유연상이 활발하므로 말을 빨리하는 것은 물론, 사고의 비약이 극적이다.
미운 오리새끼의 귀환이라도 되는 양 ‘러버덕(rubber duck)’이 떴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공공미술 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거대한 오리가 서울 석촌호수에 뜬 것이다. 그동안 이 오리는 암스테르담을 포함해 오사카, 시드니, 상파울루, 홍콩 등 전 세계 14개 도시를 순회하며 사랑을 받았단다. 문화상품으로 만든 인형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롯데월드 2관 개설과 함께 초대된 일종의 엔터테이너 비슷한 것으로, 상업적 호객행위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그 오리를 보는 관객은 왠지 즐겁다.
1997년 미국 뉴욕 체류 때 맨해튼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갔다. 신디 셔먼의 초기 사진전을 보았는데 전시장 입구에 새겨진 전시 관련 소개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후원 명단에 한 사람의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마돈나였다. 팝가수인 그가 이 전시의 주요한 후원자였다.마돈나는 신디 셔먼이 찍은 마릴린 먼로 사진을 좋아해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예술적 아이디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서로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마돈나의 미술상이었던 달렌 루츠가 이들을 중재했고, 모마(MoMA)의 사진 전문 큐레이터인 피터 갤라
서울 광화문에는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공공조형물이 있다. 이순신과 세종대왕 동상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아주 존경한다. 그런데 꼭 그렇게 정치적인 영웅들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까? 그곳에 있어야 한다면, 저런 모습이어야 할까? 정치적인 장소일수록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조형물이 있으면 안 되나? 예술작품으로서 광화문의 영웅들이 주는 감동은 때론 교보빌딩 위 약간은 촌스러운 플래카드가 주는 감동보다 못할 때가 많다. 서글픈 일이다.현대 공공조형물 중에서 눈에 띄는 스펙터클과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 나라는 영국이다
창의력 얘기가 연일 들린다. 창의경영, 창의교육, 창의기업…, 창의와 혁신만이 살길이라고 언론이 목소리를 높인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은 창조성을 결정하는 세 요소로 기술(technoloy), 재능(talent), 관용(tolerance)을 꼽았다. 관용은 곧 다양성을 의미하는데,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사회적으로 얼마나 포용해주느냐를 나타내는 지표다. 창조성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전문가들은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학생들이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단다.
현대미술은 컬렉터가 중요해졌다. 누가 샀느냐에 따라 예술가의 지명도가 급상승한다. 그 누구란 당연히 유명인, 그것도 재벌들이다.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LVMH그룹의 대표 베르나르 아르노, 구찌와 크리스티로 유명한 PPR그룹의 프랑수아 피노, 그리고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빌 게이츠, 엘튼 존, 브래드 피트 등도 세계적으로 저명한 컬렉터들이다.세계의 부자들과 유명인들이 작품을 사면 먼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작품값이 금세 오른다. 작품에 프리미엄이 붙는 것이다. 나보다 우월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소장한
“하잘것없는 위조품이라도, 거기엔 진품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 있다.” 얼마 전 흥미롭게 보았던 영화 ‘베스트 오퍼’의 대사다. 화가 출신의 아주 까다로운 늙은 경매사는 그 미덕이란 창작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모사하는 화가들은 자신을 알리고 싶은 욕심에 그림의 옷 주름이나 눈동자 등에 슬그머니 자기 이름 이니셜을 새겨 넣고는 한다는 것.명품 곁엔 짝퉁이 있다. 짝퉁은 명품의 진가를 훨씬 더 높여준다. 때론 짝퉁이 더 사랑스럽다. 미술계에선 그렇다. 그렇다면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짝퉁은 무엇인가? 서구 미술
현대미술의 기본 전략은 ‘낯설게 만들기’다. 그런데 ‘무엇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일까? 바로 익숙한 것, 평범한 것, 진부한 것, 시시한 것,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다. 귀한 것을, 보기 드문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도 하찮아서 단 한 번도 예술의 대상이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물건이 대상화되고 시각화될 때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그 익숙한 물건이 낯설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어 다른 장소에 두는 것이다. 미술 용어로는
뭉크의 전작(全作)은 자화상이다. 자신을 그렸건, 그리지 않았건 말이다. ‘절규’의 다리 밑은 뭉크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모든 요소의 결합체였다. 다리 아래 숲에서 일어난 친구의 권총자살, 여동생이 머물렀던 정신병원, 게다가 종일 울어대는 도축장까지. 그뿐 아니다. 유명작 ‘사춘기’도 자신의 불안을 초경을 맞이한 소녀에 대입시켜 표현했다. 이처럼 뭉크의 전작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시각화였다.그런 뭉크가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뭉크전(7월 3일~10월 12일)을 개최하고 있다. 뭉크의 작품을 보는
예술은 모방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화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모사해 본 적이 있다. 화가들은 모방 혹은 모사란 낡고 진부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모사는 예술 활동의 초기, 즉 학습기에 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가 따라하기’는 예술가의 초년시절에 통과의례처럼 행해지는 것이다. 그때의 모방은 대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기법, 매너, 양식을 배우는 수단이다. 회화의 기본을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고 생각했던 르네상스 전성기의 미술사가이자 화가였던 조르조 바사리도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가의 작품이란 훌
수년 전 한국의 노대가(老大家) K씨는 화가 나서 말했다. 요즘 젊은 화가들은 그림 팔아 큰돈이 생기면 외제승용차를 산다고! 그게 말이 되냐고 일갈했던 노대가는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였다.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쉰이 넘어 겨우 그림이 팔리게 되자, 조선 목가구와 도자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고미술품을 사기 위해 골동가게에서 소품을 그려 그 자리에서 맞바꾼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도 들린다. 이렇게 모은 소장품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던 그는 마침내 수백여 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이처럼 예술가들은 또 다른 예술작품의 소장가인 경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도주 중인 유병언이 파리 근교의 한 마을을 통째로 사들였단다.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장남이 마을 전체에 자기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온 마을을 캔버스 삼아 마음 내키는 대로 선을 긋고 점을 찍겠다는 발상이다. 바로 대지미술을 하겠다는 것이다. 땅 한 평 사기도 힘든 처지의 사람들이 허다한데 작품을 하겠다고 마을 하나를 샀다니 원성을 살 만한 일이다. 정작 예술가들은 그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대지미술(Earth art, Land art, Environment art)은 1960
추상미술이 수상하다.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이 존재했던 시기들에는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게 있다.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거다.독일의 미학자 빌헬름 보링거(W. Worringer·1881~1965)에 따르면 그리스처럼 축복받은 땅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관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처럼 인간이 신이 되고, 신이 인간이 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이때 사람들은 ‘감정이입충동’을 갖게 되는데, 이런 충동은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매우 영적인 순간을 포함한다. 그 결과는 그리스 예술처럼 유기적
[image1]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진정한 멀티플레이어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는 직함이 네댓 개쯤 된다. 화가, 조각가라는 미술 관련 타이틀 말고도 해부학자, 과학자, 건축가, 기술자, 물리학자, 인문학자, 시인으로 자주 불린다.시각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 것들, 즉 회화와 조각, 건축과 공예끼리야 서로 시너지를 내며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치자. 당대 미술가가 건축가를 겸임하고, 건축가는 당연히 조각가를 겸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돔을 건축한 브루넬레스키는 처음에는 조각가였으